[출처 :
http://cafe.naver.com/yeolkook] (열국연의)
이글을 어디에 옮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곳에 옮깁니다.
나는 회초리를 한 짐 지고서 누굴 찾아가야할까??
"역사는 수레바퀴 처럼 도는것이니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역사가 무었인지 생각해봐라"
제 학창시정 선생님의 말씀인데 이런저런 생각 끝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옮겨봅니다.
춘추시대 초기에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형산(荊山)1)에서 옥돌을 얻어 초나라의 려왕에게 바쳤다. 려왕이 궁중의 옥공을 불러 감정시켰다. 옥공이 감정한 결과 변화가 바친 옥돌은 아무 쓸모가 없는 돌맹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초왕이 크게 화를 내며 상금이 탐이나 자기를 기만했다는 죄명을 들어 변화의 왼쪽 발을 잘랐다. 려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무왕2)이 초왕으로 새로 섰다. 변화가 다시 옥돌을 새로운 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공을 불러 감정을 시켰으나 그 옥공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 옥들은 돌맹이에 불과하다고 고했다. 무왕도 역시 노하여 변화의 남은 오른쪽 발마저 잘랐다. 이어서 오랜 시간이 흐르자 무왕이 죽고 문왕3)이 새로 즉위했다. 변화는 그 옥들을 다시 바치려고 했지만 두 다리가 잘려 걸을 수가 없어 옥들을 가슴에 품고 형산 밑에서 4일 밤낮을 쉬지 않고 통곡하여 이윽고 변화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왔다. 초나라의 어떤 사람이 변화가 당한 일을 알고 찾아가 말했다.
" 그대는 두 번이나 돌맹이를 옥이라고 하면서 초왕에게 바쳐 두 다리를 잘렸으니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대가 혹시나 아직도 상을 바라고 옥돌을 다시 바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렇게 구슬피 울고 있는 것인가?"
변화가 대답했다.
" 내가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상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본래 좋은 옥이 오히려 아무 쓸모 없는 돌맹이라고 판정되어 그것은 마치 올곧은 선비를 잘못된 선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시비가 거꾸로 되었음에도 스스로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가 통곡하며 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문왕이 사람을 시켜 그 옥돌을 가져오게 한 다음 옥공(玉工)을 불러 그 겉을 걷어 내게 하자 과연 흠집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옥을 얻게 되었다. 문왕이 옥공에게 명하여 벽옥(璧玉)으로 만들게 하고 이름을 화씨벽(華氏壁)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오늘도 양양부(襄陽府)4) 관하 남장현(南漳縣)5)에 있는 형산(荊山)의 정상에 연못이 있는데 그 한쪽 켠에 포옥암(抱玉岩)이라는 석실이 있다. 그 석실이 바로 변화가 머무르면서 옥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던 곳이다. 초문왕이 변화의 지성에 감동하여 그에게 대부에 준하는 봉록을 내려 여생을 편하게 살게 하였다.
후세에 어떤 사람이 화씨벽의 천하의 지보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이 옥을 어두운 곳에 놓아두면 밝은 빛을 발하여 그 위에는 티끌 하나 머무를 수 없으며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도 하여'야광지벽(夜光之璧)'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일 그 벽옥을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 놔둔다면 겨울에는 주위가 훈훈해져 가히 화로를 대신할 수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해져 그 앉아 있는 장소에서 백 보 안에는 먼지나 해충이 달려들지 못한다. 이 외에도 다른 일반 벽옥은 따를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많이 나타나 이것을 지보(至寶)라고 부르는 것이다."
1)형산(荊山) :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남장현(南漳縣) 서남 무당산(武當山) 동남. 저수(沮水)와 장수(漳水)의 발원지
2)초무왕(楚武王) : 기원전 740년 재위에 올라 690년에 죽은 춘추초 때 초나라의 왕이다. 형인 분모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 제후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했다.
3)초문왕(楚文王) : 기원전 690년 즉위하여 677년에 죽은 초무왕의 아들이다.
4)양양부(襄陽府) : 지금의 호북성 양번시(襄樊市) 일대를 관할했던 명나라 때의 지방관서 이름이다. 양번시는 지금의 하남성과 호북성의 접경지역인 한수 강안의 도시다.
5)남장현(南漳縣)/ 양양부에 속했던 현 이름으로 지금도 양번시 같은 이름으로 양번시 관할하의 현이다.
한편 목현에게 화씨벽을 감정해 준 옥공(玉工)이 일이 있어 진나라에 들렸다가 진소왕(秦昭王)이 부름을 받아 옥을 다듬게 되었다. 옥공은 진소왕에게 화씨벽(華氏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금은 조나라 왕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진왕이 옥공에게 물었다.
“ 화씨벽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유명하단 말인가?”
옥공(玉工)이 얼마 전에 조나라의 목현(繆賢)에게 말한 것처럼 화씨벽의 기이한 이적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진왕이 듣고 화씨벽을 간절하게 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외삼촌인 위염(魏冉이라는 사람이 승상(丞相)의 자리에 있었다. 위염은 소양왕이 화씨벽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 대왕께서 화씨벽을 얻고 싶다면 조나라에게 유양(酉陽)의 땅 15개 성과 바꾸자고 하시기 바랍니다.”
▶유양(酉陽)/ 진(秦)왕조를 대신한 한조(漢朝) 때 지금의 호남성 서부의 무릉(武陵) 지구를 흐르는 원수(沅水: 지금의 원강(沅江))의 지류에 유수(酉水)라는 강이 있는데 유양(酉陽)은 유수 강안의 고을이었음.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봐서 진나라가 화씨벽과 바꾸자고 한 땅은 이 곳이 아니며 그 정확한 장소는 확인 할 수 없음.
소양왕이 의아해 하며 대답했다.
“ 유양의 15개의 성은 적지 않은 땅인데 내가 어찌 한낱 벽옥 하나와 교환할 수 있겠오?”
위염 “ 조나라는 오래 동안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해 왔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우리의 15개 성과 화씨벽을 교환하자고 한다면 조나라는 감히 그 명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나라 사신이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들어오면 그들을 억류시켜 놓고 화씨벽을 빼앗아 버리면 될 것입니다. 성을 준다는 것을 구실로 화씨벽을 차지하시면 성을 잃을 걱정을 하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조나라 왕 앞으로 국서를 한 통 써서 객경 호상(胡傷)을 사자로 삼아 전하게 했다.
“ 과인이 화씨벽을 오래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어해 왔으나 아직 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제가 들으니 조왕께서 화씨벽을 얻어 보관하고 있다하니 과인이 유양의 15개 성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바꾸기를 청합니다. 부디 조왕께서는 허락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왕이 국서를 받고 염파(廉頗) 등의 대신들을 불러 그 대책을 물었다. 조혜문왕은 진나라에 화씨벽을 넘겨주자니 속임을 당하여 화씨벽만 뺏기고 성을 얻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주지 않자니 진나라의 분노를 사게될 것을 걱정하였다. 어떤 대신들은 화씨벽을 보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대신들은 보내지 말아야한다고 하며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을 쉽사리 내릴 수 없었다. 이극(李克)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 한 사람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사람에게 화씨벽을 가슴에 품고 진나라에 보내, 먼저 성을 받게되면 화씨벽을 내어주라고 하시고, 성을 먼저 얻지 못하면 화씨벽을 내어 주지 말고 다시 가져오게 하면 비로소 만전을 기하게 될 것입니다.”
조왕이 염파를 쳐다보며 무언 중에 그의 의사를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환자령(宦者令) 목현(繆賢)이 앞으로 나와 조왕에게 말했다.
“ 신에게는 성은 인(藺)이고 이름은 상여(相如)라는 식객이 있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용기와 지모를 갖춘 사람입니다. 만약에 진나라에 보내는 사자를 찾으신다면 이 사람보다 낳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조왕이 즉시 목현에게 인상여(藺相如)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인상여가 입궐하여 조왕을 배알하였다. 조왕이 물었다.
“ 진왕이 진나라의 15개 성을 바쳐 과인이 가지고 있는 화씨벽과 바꾸자는 청을 해왔오. 선생께서는 그들의 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상여 “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진왕의 청을 물리치면 안될 것입니다.”
조왕 “ 그러나 만일 우리가 화씨벽만 빼앗기고 성을 얻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오?”
인상여 “ 진나라가 15개의 성과 화씨벽을 바꾸자고 한 것은 화씨벽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조나라가 진나라의 청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우리 조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조나라가 진나라의 성들을 접수하기도 전에 먼저 화씨벽을 보내준다면 그것은 바로 성의를 다하여 예를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그 성들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바로 진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
조왕 “ 과인이 이 일로 해서 화씨벽을 온전히 간수할 만한 사자를 뽑아 진나라에 보내야 합니다. 선생은 과인을 위해 진나라에 갈 사자의 임무를 능히 행하실 수 있습니까?”
인상여 “ 대왕께서 사자의 임무를 수행할 마땅한 사람을 구하실 수 없다면 신이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가서 만약이 진나라가 약속대로 15개의 성을 조나라에 할애한다면 신은 마땅히 그 화씨벽을 진나라에 넘겨줄 것이며, 그렇지 않고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그대로 건사하여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혜문왕(惠文王)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인상여에게 대부의 작위를 내린 다음 화씨벽을 내 주었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가지고 서쪽으로 나아가 진나라의 함양성(咸陽城)에 들어갔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은 화씨벽을 가지고 조나라의 사신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대(章臺) 위에 군신들을 모두 부른 다음에 조나라의 사신이 조현(朝見)을 드릴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상여가 보물함은 관사에 남겨두고 단지 비단주머니에 들어있는 화씨벽을 두 손으로 바쳐 들고 들어와 진왕에게 정중히 바치고 절을 올렸다. 소양왕이 비단주머니를 풀어 살펴보니 순백색의, 티가 하나도 없는 광채가 현란하게 비치며, 그 조각한 솜씨가 훌륭하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이는 실로 희세(稀世)의 진기한 보물인 화씨벽이 있었다. 진왕은 만족한 모습으로 화씨벽을 한참 바라보며 실로 찬탄해 마지않았다. 이에 소양왕은 좌우에 도열에 있던 군신들에게 화씨벽을 건네며 차례대로 돌려가며 구경하게 했다. 군신들이 보기를 마치자 소양왕을 둘러싸며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외쳤다.
“ 만세! ”
소양왕이 내시들에게 명하여 화씨벽을 다시 비단보자기에 쌓게 한 다음에 궁궐로 가져가 후궁(后宮)과 미인(美人)들에게 구경시키라고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후궁으로 갔던 내시가 화씨벽을 다시 가져와 진왕의 곁에 있던 탁자 위에 놓았다. 인상여가 진왕의 옆에 서서 오래 동안 기다렸으나 주겠다던 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자 마음속으로 한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고는 진왕 앞으로 나가 말했다.
“ 그 화씨벽에는 아주 조그만 티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왕께 그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진왕이 좌우에 시립한 측근에게 명하여 화씨벽을 인상여에게 내어 주라고 했다. 화씨벽을 건네 받은 인상여는 몇 발자국 뒷걸음치며 장대(章臺) 안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두 눈을 부릅뜨며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진왕에게 말했다.
“ 화씨벽은 천하의 보물 중에 보물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화씨벽을 얻기 위해 우리 조나라에 국서를 보내자, 조왕께서는 군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조나라의 군신들은 모두 대답했습니다.
‘진나라가 그들의 세력이 강한 것을 믿고 빈소리로 화씨벽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화씨벽만 빼앗기고 성을 얻을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니 화씨벽을 진나라에 보내시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신만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말했습니다.
‘포의(布衣)를 입은 시정의 일반 사람들도 사귐에 있어서 서로 속이지 않는데, 하물며 만승지국(萬乘之國)의 군주들이 사귀는데 서로 속이면 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어리석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여 진왕에게 죄를 얻으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 조왕께서는 즉시 5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한 다음 소신을 시켜 화씨벽을 받들고 대왕의 궁정으로 가져와 바치게 한 것입니다. 실로 우리 조왕께서는 지성을 다하여 대왕의 뜻을 받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대왕께서 신을 대하시는 태도는 예절을 갖추지 않고 거만한 자세로 좌정하여 화씨벽을 받으시고, 좌우의 측근들에게 건네주어 차례로 구경시켰으며, 다시 후궁과 미인들에게까지 보내어 구경시켜 가지고 놀게 하시어 이 귀중한 화씨벽을 심히 모독하였습니다. 이로써 소신은 대왕께서는 약속하신 15개의 성을 주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제가 이 화씨벽을 돌려 받게 된 것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신을 강제하여 화씨벽을 빼앗아 가시려고 하신다면, 신의 머리와 이 화씨벽은 이 기둥에 받쳐 모두 부셔져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상여가 말을 마치자 기둥을 노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화씨벽을 기둥에 던지려고 하였다. 소양왕은 화씨벽을 아까워한 나머지 정말로 인상여가 깨뜨려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즉시 인상여에게 사죄의 말을 하였다.
“ 대부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 과인이 어찌 감히 조나라에게 신의를 잃겠는가?”
진왕은 즉시 관리를 불러서 할양하겠다던 유양(酉陽) 땅의 지도를 가져오게 하여 자기가 직접 지도를 가리키며 15개의 성이 있는 곳을 조나라에 주겠다고 설명했다. 인상여는 마음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 이것은 진왕이 거짓으로 나를 속여 화씨벽만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지 정말로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
인상여가 진왕에게 말했다.
“ 우리 조왕께서는 비록 희세의 보물을 사랑하고 계시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대왕께 죄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어 신을 이곳으로 보내실 때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군신들을 두루 불러 의식을 행한 다음 신을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도 역시 마땅히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신 다음 구빈대전(九賓大典)의 의식을 성대하게 행하시어 위엄을 갖추신다면 신이 즉시 화씨벽을 대왕께 바치겠습니다.
▶구빈대전(九賓大典)/중국 고대에 있어서 외교상 상대국의 사신을 맞이하는데 행하는 가장 정중한 의식. 아홉 명의 의전관이 열을 지어 사신을 왕이 앉아 있는 전당 위로 인도하는 의식임.
소양왕 “ 그대의 말대로 하리라!”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을 품에 안고 관사에 돌아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내가 조나라를 떠날 때 조왕에게 이미 진나라가 만약 성을 내주지 않는다면 이 화씨벽을 무사히 보전하여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오늘 내가 보니 진왕이 비록 목욕재계한 다음 성대한 의식을 차린 가운데에 화씨벽을 받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러나 만일 화씨벽만을 받고서 성을 내주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조왕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인상여가 즉시 자리에 일어나 자기의 수행원 한 사람을 불러 갈포로 만든 허름한 옷으로 바꾸어 입혀 거지로 변장하게 한 다음 화씨벽을 전대에 쌓아 허리에 두르게 하고 지름길을 이용하여 아무도 몰래 조나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 수행원은 돌아가 인상여의 말을 조왕에게 전했다.
“ 신은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속여 화씨벽만을 받고 그 대가로 성을 내줄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삼가 수행원 편에 화씨벽을 대왕께 돌려보냅니다. 신은 진나라에서 죄를 얻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대왕의 명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왕 “ 상여가 과연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않았구나!”
한편 진소양왕은 거짓으로 5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다고 말은 했지만 실은 행하지 않았다. 이윽고 5일의 시간이 지나자 소양왕은 수많은 예물로 장식한 전당에 성대한 의식을 준비하게 한 다음 진나라에 와 있는 제후국들의 사자들을 모두 의식에 참여하도록 영을 내려 화씨벽을 접수하는 의식을 구경하도록 했다. 그것은 진왕의 위세를 열국의 사자들에게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전당의 옥좌에 앉은 진왕은 의식의 진행을 맡아보는 찬례관(贊禮官)에게 명하여 조나라의 사신을 전당 위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상여는 침착한 모습을 하고 느린 걸음으로 전당 안으로 들어왔다.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알현하는 의식을 마쳤으나, 상여의 손에는 화씨벽이 들려있지 않았다. 소양왕이 인상여에게 물었다.
“ 과인이 이미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화씨벽을 받는 의식을 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화씨벽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인상여 “ 진나라는 목공(穆公)이래로 지금까지 20여 임금이 있었는데 모두가 사술(詐術)로서 외국을 대했습니다. 멀게는 기자(杞子)라는 장수는 정나라를 속였으며 정나라 원정군의 대장이었던 맹명시(孟明視)는 사로잡혔다가 풀려날 때 당진의 군주를 속였습니다. 가깝게는 상앙(商鞅은 위나라의 장수 공자앙(公子卬을, 장의(張儀)는 초나라 회왕을 속여 농락하였습니다. 옛날을 돌아보면 진나라가 외국에 신의를 지키지 않은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신이 오늘 오로지 대왕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게 되면 저희 조왕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만을 걱정하여 저의 수행원 중의 한 사람에게 화씨벽을 주어 지름길을 취하여 조왕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신에게 마땅히 죽음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소양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 그대는 내가 불경스럽다고 말하여, 나는 5일 동안 목욕재계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 다음 성대한 의식을 벌려 화씨벽을 넘겨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대는 오히려 화씨벽을 조나라에 돌려보냈으니 이것은 분명 과인을 심히 기만한 것이다.”
소양왕이 좌우의 시위 무사에게 호통을 쳐서 인상여를 포박하라고 명했다. 인상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소양왕에게 말했다.
“ 대왕은 잠시 노여움을 걷으시고 소신에게 한 말씀 올리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일어난 일의 경위를 따져보면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여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잘못한 것이지 결코 조나라가 진나라에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대왕께서 진심으로 화씨벽을 얻으시고자 하신다면 먼저 유양(酉陽)의 15개 성을 먼저 조나라에 때어주시고, 이어서 한 사람의 사자를 소신에게 딸려 보내시어 조나라에 들어가 화씨벽을 받아오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조나라가 어찌 감히 성을 먼저 얻어놓고 화씨벽을 넘겨주지 않아 천하의 제후들에게 그 신의를 잃고 또한 대왕에게 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스스로 대왕을 속여 대죄를 지었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신은 이미 저희 조왕께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컨대, 저를 가마솥의 끓는 물에 삶아 죽이시어 진나라가 화씨벽을 얻으려 하다가 조나라 사자를 죽여 그 잘못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을 천하의 제후들에게 알리시기 바랍니다.”
진소양왕과 그 신하들은 모두가 서로 얼굴만을 쳐다보며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제후국들에서 온 사자들은 인상여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모두 두려워하였다. 좌우에 시위하던 무사들이 인상여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소양왕이 큰 소리로 외쳐 멈추게 하면서 여러 군신들을 향해 말했다.
“ 조나라 사신 인상여(藺相如)를 죽인다면 화씨벽을 못 얻어 일은 헛되고, 또한 우리 진나라는 의롭지 못하다는 허물만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어서 진과 조 두 나라의 우호관계도 끊어지게 될 것이다. ”
소양왕은 즉시 인상여를 후하게 대접하고 예를 갖춘 다음 조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염옹(髥翁)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논했다.
‘ 진나라가 성읍을 공격하여 빼앗아 간다해도 달리 어찌 할 수 없었는데 단지 벽옥(碧玉) 한 개가 어찌 그리 귀하다고 생각했겠는가? 인상여가 뜻한 바는 단지 조나라가 진왕에게 기만을 당하여 화씨벽을 빼앗김으로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얕보아 장래에 나라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을 걱정한 것 때문이었다. 만일 진나라가 계속해서 땅을 떼어 바치라든지, 아니면 인질을 보내라든지 한다면 조나라는 거역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여 진왕으로 하여금 조나라에도 자기와 같은 인재가 있음을 알려 조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였다.’
인상여가 조나라에 귀국하자 혜문왕은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상대부(上大夫)의 작위를 내렸다. 그 후에 진나라는 결국은 조나라에 성을 내주지 않았으며 조나라도 역시 화씨벽을 진나라에 바치지 않았다.
소양왕은 즉시 인상여를 후하게 대접하고 예를 갖춘 다음 조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염옹(髥翁)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논했다.
‘ 진나라가 성읍을 공격하여 빼앗아 간다해도 달리 어찌 할 수 없었는데 단지 벽옥(碧玉) 한 개가 어찌 그리 귀하다고 생각했겠는가? 인상여가 뜻한 바는 단지 조나라가 진왕에게 기만을 당하여 화씨벽을 빼앗김으로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얕보아 장래에 나라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을 걱정한 것 때문이었다. 만일 진나라가 계속해서 땅을 떼어 바치라든지, 아니면 인질을 보내라든지 한다면 조나라는 거역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여 진왕으로 하여금 조나라에도 자기와 같은 인재가 있음을 알려 조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였다.’
인상여가 조나라에 귀국하자 혜문왕은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상대부(上大夫)의 작위를 내렸다. 그 후에 진나라는 결국은 조나라에 성을 내주지 않았으며 조나라도 역시 화씨벽을 진나라에 바치지 않았다. 진소양왕은 화씨벽의 일로 해서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다시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어 조왕과 서하(西河)의 민지(澠池)라는 땅에서 만나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다지자고 청했다. 조의 혜문왕이 군신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민지(澠池)/ 지금의 하남성 민지현(澠池縣) 경내. 낙양시 동쪽 약 50키로 지점에 위치한 고을로 춘추전국시대 때 진(秦)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통과해야 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 옛날 진나라가 초나라의 회왕을 속여 회맹을 하자고 해놓고 그를 함양으로 데려가 구금하여 결국은 그곳에서 죽게 만들었다. 아직도 초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다시 과인을 청하며 회합을 하자고 하니 진나라가 초회왕에게 했던 것처럼 과인을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모아 상의하였다.
“ 왕이 만약 가지 않는다면 진나라에게 우리의 약점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어서 두 사람이 혜문왕 앞으로 나가 상주하였다.
“ 신 상여(相如)는 원컨대 수행하여 어가를 보호하고 장군 염파는 태자를 보좌하여 나라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조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 상여는 옛날에 화씨벽도 능히 보전할 수 있었는데 과인이라고 해서 어찌 보전하지 못하겠는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이 말했다.
“ 옛날 송양공(宋襄公)이 군사를 대동하지 않고 회맹에 참석하여 초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혔었습니다. 노후(魯侯)는 제후(齊侯)와 협곡(夾谷)에서 만날 때 좌우의 사마들을 호종시켜 신변의 안전을 꾀했습니다. 오늘 비록 상여가 어가를 수행한다고 하나 그 한 사람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으니 정예한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대왕을 호종하게 하시어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대군을 출동시켜 회합하는 장소에서 30리 떨어진 곳에다 진을 치게 하여 만전을 기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 기원전 500년 노정공(魯定公)이 지금의 산동성 래무현(萊蕪縣)인 협곡(夾谷)에서 공자(孔子)와 노나라의 좌우 사마(司馬)들인 대부 신구수(申句須)와 락기(樂頎가 이끄는 군사들을 대동하고 제경공(齊景公)과 회합한 것을 말한다.
조왕 “ 5천 명의 정예병을 선발해서 데려간다면 누구를 대장으로삼아야 하겠습니까?”
평원군 “ 신은 옛날부터 전부(田部)의 하급 관리인 조사(趙奢)란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그야 말로 진실로 대장의 재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사(趙奢)/ 전국 때 조나라의 장군이다. 원래 세금을 걷는 전부(田部)의 하급관리로 당시 조나라의 권세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가노들이 징세에 불응하자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그들을 처형했다. 이에 조사의 사람됨을 알아본 평원군이 조왕에게 조사를 전부의 총책임자로 천거했다. 그러자 조나라의 재정은 튼튼하게 되었다. 후에 장군에 임명되어 조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기원전 270년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여 연여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 공으로 조사는 마복군에 봉해졌다. 장평대전을 지고 조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조괄은 그의 아들이다.
조왕 “ 어떻게 그가 대장의 재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까?”
평원군 “ 조사는 전부의 관리로서 조세(租稅)를 거둘 때 신의 가신(家臣)들이 기한이 넘도록 세금을 내지 않자, 그가 신의 가신들을 그 일로 붙잡아 가서 치죄하여 아홉 명이나 사형에 처했습니다. 신이 노하여 이목을 불러다가 꾸짖자 그가 신에게 말했습니다.
‘나라가 지탱되고 있는 것은 바로 법입니다. 만일 오늘 군의 가신들에게 죄를 주지 않고 방면해 주어 공사(公事)를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법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며, 법을 깨뜨리게 되면 그것은 곧 나라가 쇠약하게 되어 만일 제후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온다면 우리나라는 결코 보존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군의 집안인들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군이 나라에서 귀한 신분인 것은 공사(公事)를 법대로 집행한 것 때문이며, 법이 서게 되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그리되면 군께서는 부귀를 오래도록 누리게 될 것인데 어찌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그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비상한 사람이라 신은 곧 그가 대장의 재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왕이 즉시 조사를 불러 중군대부(中軍大夫)에 임명하고 군사들 중에서 선발한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자기를 호종하게 하였다. 평원군은 대군을 지휘하여 조왕의 일행과는 거리를 두며 그 뒤를 따랐다. 염파가 조왕의 일행을 전송하여 따라 나섰다가 국경에 이르자 조왕에게 말했다.
“ 대왕께서는 지금 호랑이나 승냥이와 같은 진나라의 경내에 들어가시니 참으로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소신에게 약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왕께서 가시는 길의 여정을 헤아려본 바 회합하는 장소에 가서 진왕과 서로 간에 예를 행하고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상의하는데는 30일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만약 30일 지나도 대왕께서 돌아오시지 못하신다면, 옛날 초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거울 삼아 태자를 왕으로 세우고 진나라와의 국교를 끊겠습니다.”
조왕이 염파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윽고 조왕의 일행이 먼저 민지(澠池)에 당도하자 진왕도 역시 얼마 있지 않아 도착하여 각기 자기의 관사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이윽고 회합하기로 한 날이 되자 두 나라의 왕들은 서로 상견례를 취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환담하였다. 술이 몇 순 배 돌고 분위기가 거나하게 되었을 때 진왕이 조왕에게 말했다.
“ 과인은 옛날에 조왕께서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금 과인에게는 보물과 같이 귀히 여기는 거문고가 여기 있으니 청컨대 저에게 한 번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수치감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감히 진왕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진왕을 모시던 시종 한 사람이 거문고를 들고 조왕의 면전으로 가져갔다. 조왕이 거문고를 받아들고 <상령(湘靈)>이라는 곡을 연주하였다. 진왕이 조왕의 거문고 타는 솜씨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윽고 진왕이 상령곡의 연주를 마친 조왕을 향해 말했다.
“ 과인은 조나라의 시조(始祖)와 그 뒤를 이었던 열후(烈侯)들이 모두 음악을 좋아했다는 것을 들었는데 과연 조왕께서도 가문의 전통을 이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진소왕이 대동하고 왔던 사관들을 불러 조왕이 자기 앞에서 거문고를 탔다는 것을 사서에 써넣도록 했다. 진나라의 사관이 붓을 들고 목간에다 다음과 같이 기재하였다.
“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과 민지(澠池)에서 회합을 하고 조왕에게 명하여 거문고를 타게 했다.”
인상여가 보고 앞으로 나오더니 진왕을 향해 말했다.
“ 진왕께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문을 들으신 저희 조왕께서는 신에게 삼가 이 분부(盆缶)를 바치게 하여 이것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면서 노래를 한 곡 불러, 이 회합을 즐겁게 해 주실 것을 청하셨습니다. ”
☞분부(盆缶)/ 액체를 담는 도기로 만든 용기의 하나. 달걀을 눕혀 놓은 모양으로 그 중간에는 좁은 아가리가 나 있다. 고대의 진나라 풍속에 연회장에서 이것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진왕이 노하여 얼굴색이 벌겋게 변하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즉시 술이 가득 찬 술단지를 들고 진왕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끓으며 그것으로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 노래부르기를 청했다. 진소양왕이 여전히 술단지를 두드리려고 하지 않자 인상여가 노기를 띄우며 말했다.
“ 대왕께서는 진나라의 세력이 강하다고 믿고 계시는 듯 하나, 오늘은 단지 소신과는 다섯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이 상여의 머리로 대왕의 몸을 피로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소양왕의 좌우에 있던 측근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 참으로 무례한 자로다!”
그들이 앞으로 달려나가 붙잡으려고 하자 인상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까지 곤두세워 큰소리로 일갈하자 달려들던 소양왕의 측근들은 모두 크게 놀라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질을 쳤다. 소양왕은 결코 내키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인상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인상여가 바친 술단지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인상여가 이윽고 몸을 일으키더니 조나라에서 데려온 사관을 불러 역시 목간에 자기가 부르는 대로 적게 하였다.
“ 모년 모월 모일에 조왕은 진왕과 민지(澠池)에서 회합을 하다가 진왕에게 명하여 분부(盆缶)를 치게 하였다. ”
진나라의 신하들은 진왕이 모욕을 당한 것에 분노하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조혜문왕(趙惠文王) 앞으로 가서 무례한 요구를 하였다.
“ 오늘 조왕께서 이곳으로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청컨대 조나라의 15개 성을 떼어 진나라에 바쳐 우리 대왕님의 만수를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인상여도 역시 자리에 일어나 진왕 앞으로 가더니 말했다.
“ 예란 서로 주고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나라가 이미 15개 성을 떼어 진나라에 바쳤다면 진나라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어 보답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청컨대, 진왕께서는 함양성(咸陽城)을 떼어 바쳐 우리 조왕의 만수를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소양왕이 큰 소리로 진나라의 신하들을 꾸짖었다.
“ 두 나라의 군주들이 회합을 하여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왜 이리 잔말이 많은가?”
진왕은 즉시 좌우의 측근에게 명하며 술잔에 술을 따라 돌리게 하고 짐짓 유쾌하게 즐긴 척 하다가 연회를 파했다. 진나라의 객경 호상(胡傷) 등이 진왕에게 가서 조왕과 인상여를 붙잡아 억류시켜야 한다고 은밀히 권했다. 진왕이 대답했다.
“ 내가 보낸 첩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조나라는 이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오. 만일 섣불리 일을 행했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이어서 소양왕은 조왕을 더욱 공경하며 결의형제를 맺고 두 나라는 영원히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어서 소양왕은 진나라의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중에서 이인(異人)이란 공자를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기로 약속했다. 진나라의 대신들이 모두 불평을 하며 소양왕에게 말했다.
“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만으로 족한 일인데 하필이면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양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조나라는 바야흐로 국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도모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인질을 보내지 않는다면 조나라는 믿지 않을 것이다. 조나라가 우리를 믿게된다면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는 공고해질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한나라 경영에 온 힘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
진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소양왕의 의견에 탄복하였다.
조왕이 진왕에게 작별을 고하고 정확하게 30일 만에 귀국했다. 조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 과인은 인상여 덕분으로 태산과 같은 신변의 안전을 얻었고 이제 우리 조나라의 사직은 구정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인상여의 공이라 하겠으며 어떤 신하들일지라도 그의 공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조혜문왕은 민지의 회맹에서 돌아와 인상여를 상경(上卿)으로 임명하고 그의 직위를 염파보다 높게 두었다. 인상여가 자기 보다 높은 직급을 차지하자 염파는 화를 내며 말했다.
“ 나는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큰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헛되이 혀만 놀려 별로 애쓴 것도 없는데 어찌하여 그가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인상여라는 사람은 내시 나부랭이의 문객 노릇을 했던 출신이 미천한 자인데 내가 어찌 그의 밑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인상여가 내눈에 띄우기만 한다면 내 결코 그를 살려두지 않으리라!”
인상여는 염파가 한 말을 전해듣고 조회를 열 때마다 병이 들었다고 참석하지 않아 염파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인상여의 문객들은 그가 매우 겁이 많다고 하면서 서로들 모여 앉아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상여가 밖으로 외출을 나갔는데, 그때 마침 염파도 외출을 나왔다. 염파가 탄 수레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인상여는 황급히 마부에게 명하여 수레를 골목길로 몰게 한 다음 염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큰길로 나왔다. 인상여의 문객들은 화를 내며 서로 의논을 하더니 이윽고 상여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 우리들이 고향과 친척들을 버리고 대감 밑으로 들어와 문객이 된 것은 대감은 당대의 대장부라 생각하고 서로 사모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대감과 염파 장군은 동열의 작위에 직급은 오히려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염파 장군은 매 번마다 대감에게 욕을 하고 다님에도 대감은 복수하려는 마음을 먹기는 고사하고 조회에도 나가지 못하다가 오늘은 외출 나갔다가 골목길에 숨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대감께서는 그리도 염파를 무서워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들은 대감과 같은 겁쟁이 밑에서 문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오를 대감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이 집을 떠날까 합니다.”
인상여가 문객들을 간곡하게 만류하며 말했다.
“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인상여의 문객들이 물었다.
“ 우리들은 천박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청건대대감께서 그 연유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인상여 “ 여러분들은 염파장군이 진왕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하십니까?”
문객들 “ 그렇지 않습니다.”
인상여 “ 무릇 진왕의 위세는 천하의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여는 진왕을 그의 궁정 뜰에서 야단을 쳤으며 그의 신하들을 욕보였습니다. 이 상여가 비록 재능이 없고 아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유독 염파 한 사람만을 두려워하겠오? 강포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군사를 보내어 침략하지 않은 것은 다만 나와 염파 장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이 싸운다면 두 사람 모두 살아남기 어려울 것인데, 진나라가 그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 틈을 이용하여 조나라를 침공할 것입니다. 내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염파장군을 피하기만 한 것은 나라의 일을 중하게 여기고 사사로운 원한을 더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상여의 문객들은 그의 말에 탄복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여와 염파의 문객들이 뜻밖에 주막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양쪽이 모두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인상여의 문객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 우리 인상여 대감은 나라의 일을 더 중하다고 여겨 염장군에게 양보하고 있다. 우리들도 마땅히 주인의 뜻을 본받아 염장군의 문객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래서 염파의 문객들은 더욱 교만해졌다.
하동인(河東人) 우경(虞卿)이라는 사람이 조나라에 놀러 왔다가 인상여의 문객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조왕을 만나 말했다.
▶우경(虞卿)/ 전국 때 사람으로 이름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조효성왕(趙孝成王)을 찾아가 유세하여 상경에 임명되고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인 우(虞) 땅을 봉지로 받았다. 이에 우경이라 한 것이다. 진과 조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장평대전(長平大戰)이 벌어지기 직전에 우경은 조왕에게 많은 보물과 함께 사자를 초(楚)와 위(魏) 두 나라에 보내 회유하여 조나라 측에 끌어들여 진나라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진나라가 공격해오자 조나라는 장평
의 싸움에서 지고 그 군사 45만을 잃었다. 진나라는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초와 위 두 나라가 구원군을 보내자 진나라는 포위망을 풀고 물러갔다. 조왕이 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조나라의 땅을 떼어 바치고 진나라와 강화를 맺으려고 하였다. 우경은 온 힘을 다하여 진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했다. 조왕이 자기의 뜻을 꺾고 우경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후에 위제(魏齊)와의 우의를 지키기 위해 조나라의 만호
에 달하는 봉읍과 재상의 인장을 버렸다. 원래 위제는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진나라의 재상 범수(范睢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범수가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위나라에 위제의 목을 요구했다. 위제가 위나라에서 달아나 조나라로 들어가 평원군의 집에 숨었으나 진나라가 조나라를 위협하여 위제를 잡아 보내라고 했다. 조왕은 군사를 평원군의 집에 보내 사로잡으려 하자 위제는 다시 평원군의 집에서 나와 우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경은 위제와 함께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가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신릉군이 만나주지 않자 위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경은 그 일로 해서 대량성(大梁城)에서 고난을 겪었다. 저서에 <우씨춘추(虞氏春秋)> 15편이 있다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 대왕께서는 지금 조나라의 신하들 중 가장 신임하고 있는 사람은 인상여와 염파가 아닙니까?”
조왕 “ 그렇소!”
우경 “ 신이 듣기에 옛날의 조나라 조정에는 본받을만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가득하여 서로 삼가하며 공사에 힘써 마음을 합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믿고 계시는 두 사람의 중신들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물과 불같다고 생각하니 이것은 조나라의 사직에 좋지 않는 일입니다. 무릇 인상여와 그의 편에 속한 사람들은 더욱 양보만 하고 있고, 이와는 반대로 염파와 그에 속한 사람들은 인상여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염파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
들은 더욱 교만해져서 이제는 오히려 인상여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정에 일이 있어도 서로 같이 의논하지 못하고 장차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어도 서로 구하려고 하지 않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마음속으로 걱정한 끝에 염파와 인상여를 서로 화해시켜 대왕을 도우려고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조왕이 우경의 청을 허락하였다.
우경은 즉시 염파의 집을 방문하여 먼저 염파가 세운 공로를 칭송하였다. 염파가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우경 “ 조나라에 끼친 공로를 말한다면 장군만한 사람은 없으며 도량이 크기를 말한다면 인상여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염파가 듣더니 얼굴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말했다.
“ 그자는 한갓 겁 많은 필부에 불과할 뿐이라 혓바닥만 나불거려 공명을 취한 자인데 어찌 도량 운운하는 것입니까?”
우경 “ 인상여는 겁쟁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도량이 매우 큰 사람입니다.”
우경이 이어서 인상여의 문객들이 하는 말을 염파에게 상세하게 들려주며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장군이 만약에 조나라에 몸을 두지 않기로 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기왕에 조나라에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면 두 사람의 대신들 중 한 사람은 마냥 양보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의 대신은 마냥 싸움만 하고 있으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결국은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은 장군이 아니고 인상여 대감일 것이요.”
염파가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 선생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내가 나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인상여 대감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염파는 우경을 먼저 인상여에게 보내 자기의 뜻을 전하게 했다. 이어서 자기는 윗통을 벗어 육단(肉袒)의 몸으로 몽둥이를 등에 짊어지고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이르자 큰 소리를 쳐 사죄의 말을 했다.
▶육단(肉袒)/ 고대 중국에서 군주가 적국의 군주에게 항복할 때 혹은 사대부가 그 상대에게 죄를 청할 때 행하는 의식으로 윗통을 벗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 입에는 구슬을 물고 손에는 양을 끌고 적장 앞으로 나와 승리한 쪽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뜻을 표시하는 요식행위다.
“ 비루한 사람의 천박하고 좁은 소견으로 상국의 넓고 큰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듯 교만하게 행세했으니 나는 죽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염파는 인상여의 집 앞뜰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인상여에게 죄를 청했다. 인상여가 소식을 듣고 급히 집안에서 뛰쳐나와 염파를 일으키며 말했다.
“ 우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주군을 모시고 있어 사직을 지키고 있는 신하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장군은 능히 이제 나의 뜻을 헤아리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장군께서 번거롭게 나에게 죄를 청하는 것입니까?”
염파 “ 소인은 성격이 천박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또한 포악하기조차 합니다. 대감의 너그러운 은혜를 입었으니 참으로 내가 부끄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염파가 인상여를 붙들고 눈물을 훌렸다. 인상여도 역시 염파를 붙들고 같이 울었다. 염파가 말했다.
“ 오늘부터 대감과 생사를 같이하는 결의형제를 맺어 비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변치 않겠습니다.”
염파가 먼저 인상여에게 절을 올리자 상여도 같이 절을하여 답하였다. 이어서 인상여는 술을 내와 잔치를 벌려 염파를 극진히 대하며 서로 즐겁게 놀다가 헤어졌다. 후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맺은 교우관계를 일컬어 문경지교(刎頸之交)라고 했다. 이를 두고 무명씨가 시를 지었다.
引車趨避量誠洪(인차추피량성홍)
수레를 골목으로 몰아 몸을 피한 인상여의 도량은 참으로 넓다 하겠거니와
肉袒將軍志亦雄(육단장군지역웅)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육단을 행한 염파도 역시 영웅이라!
今日紛紛競門戶(금일분분경문호)
지금의 사람들은 분분하게 서로 앞다투어 자기 세력을 다투기에 바쁘니
誰將國計量胸中(수장국계량흉중)
그 누가 나라를 위해 가슴에 웅대한 계책을 지니고 있겠는가?
조혜문왕은 우경에게 황금 백일(百鎰)을 하사하고 상경(上卿)의 벼슬을 내렸다.
Monday, October 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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